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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생애

by 돌돌모아 2024. 10. 3.

 

 

프리다 칼로는 누구인가

프리다 칼로(1907년 6월 6일1954년 6월 13일)는 멕시코의 화가. 셀프포트레이트 작가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카를로의 인생은 멕시코시티의 그의 생가 푸른 집에서 시작돼 역시 푸른 집에서 끝났다. 그의 작품은 멕시코와 원주민 전통의 상징으로 축하되고 있으며, 여성적인 감각과 형태를 솔직하고 냉철한 시각으로 표현한 페미닌 아티스트의 대표로 페미니스트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멕시코 문화와 미국 문화의 전통이 그녀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미술사에서 소박파나 토착 고유의 포크 아트로 자리 잡기도 한다.슈를레알림으로서도 평가가 높고, 실제로 1938년에 슈를레알림의 리더 앙드레 브르통으로부터 「프리다의 예술은 폭탄에 연결된 리본이다」라고 극찬을 받았다. 덧붙여 프리다 자신은, 슐레어 리스트라고 라벨을 맞는 것을 거부하고 있어, 자신의 작품은 꿈보다도 자신의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 지향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프리다 칼로의 유년 시절 

카를로는 어릴 적 버스와 노면전차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교통사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3개월 정도 격리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 후유증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 만년에는 오른발의 혈액 순환이 부족해 손가락 끝이 괴사, 절단해야만 했다.

카를로는 멕시코 벽화운동으로 알려진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힘든 일이 많았다. 결혼 후, 3번 임신했지만, 유년기의 사고의 후유증으로 골반이나 자궁에 손상을 입고 있던 것이 원인이 되어 3번 모두 유산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카를로에게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후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여동생과 바람둥이 남편 리베라의 불륜, 카를로의 예술적 성공을 시기하는 리베라 사이에 부부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알기 때문에, 나를 그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가 겪은 사고와 작품세계 

 

그러나 1925년 버스와 노면전차의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카를로는 3개월 동안 보행할 수 없게 된 것을 계기로 과학과 예술에 관심이 있던 그녀는 의학 전문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생각하게 된다.카를로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특제 이젤과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이젤 위에 설치할 수 있는 거울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고를 경계로 회화는 카를로에게 있어서 정체성이나 존재이유를 탐구하는 방법이 되었다. 후에 교통사고와 그때의 고립시의 회복기간은 「자기 자신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그렸으며,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녀의 사상을 형성시켰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1929년 남편 리베라와 모렐로스로 이주했고, 그 때 살던 스페인식 쿠에르나바카에게 영감을 받는다. 예술 스타일을 변화시키고 멕시코 토착 예술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을 기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술사가 안드레아 케튼만은 카를로는 아돌포 베스트 모가드의 논문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원근법의 결여나 콜럼버스 이전과 식민지 시대의 멕시코 예술 요소의 조합 등 모가드가 연구하던 주제를 카를로는 많이 도입하고 있다. 멕시코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멕시코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은 평생 카를로 예술의 중요한 측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