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아트

by 돌돌모아 2024. 10. 4.

 

 

곡선을 많이 사용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특징인 아르누보(19세기 말20세기 초)의 대표적 화가인 알폰스 무하는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미술에 익숙하지 않아도 '무하라면 알고 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별, 보석, 꽃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스타일과 유려한 곡선을 많이 사용한 디자인은 '무 스타일'로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알폰스 무하란 누구인가

알폰스 무하(1960~1939년)는 19세기 말에서 20세 초에 파리에서 활약한 시기가 유명하지만 체코 출신입니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무하는 중학교에 들어가 교회 성가대에 들어갔습니다. 음악가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15살 때(1875년)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어 음악가의 길은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여름방학에 합창대 성가집 표지를 그리는 등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에서 좌절하기도 했고, 무하는 중학교를 중퇴, 지방법원에서 일했습니다. 운명이 다르면 '화가 무하'는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무하가 태어난 체코는 당시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습니다.  '자신들의 나라를 가질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지하기 어렵습니다만, '일하고 있는 회사가 매수되어 일하기 어려워져 버린' 상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배경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 아래의 각 민족 중에는 '언젠가 우리 나라를 갖자'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알폰스 무하의 예술에 대한 열정

예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미술학교로. 몇번이나 좌절했던 밑바닥 시절을 겪은 무하는 15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지방법원에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예술의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17세 때 프라하의 미술 아카데미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했습니다. 무하는 19살에 비엔나에 갔습니다.  당시 빈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상경'입니다. 무하는 연극 무대 장치를 만드는 카우츠키=브리오시=부르크하르트 공방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야간 데생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무렵 빈 사교계의 중심이기도 했던 화가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을 접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상경한 효과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년 후인 1879년에 링 극장이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 공방도 구조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무하는 정리해고의 대상이 되어, 21세에 실업해 버립니다.

 22세 때인 1882년에는 빈에서 남모라비아 지방의 미크로프로 옮겨 현지 명사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수입을 얻고 있었습니다. 한 번 상경했지만 꿈이 깨지고 출신지 옆의 현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일까요. 무하의 밑바닥 시절은 좌절이 여러 번 이어졌습니다.

 



 20대의 무하

알폰스 무하는 1883년~86년 사이에는 쿠엔 벨라시 백작에게 고용되어 동생인 에곤 백작이 소유한 엠마호프성과 간데구성에서 벽화를 제작하고 복원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에곤 백작은 무하의 후원자가 되었고, 백작의 도움으로 무하는 뮌헨 미술원에 입학. 뮌헨에서는 '슈크레이터'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미국의 피섹 교회를 위해 '성 치릴과 성 메토데이'를 그렸습니다.

1887년에는 파리의 아카데미·줄리안에 입학. 1888년에는 아카데미 콜라로시로 옮겼습니다. 1889년에 백작으로부터의 원조가 중단된 후에는 프랑스와 체코의 잡지나 서적의 삽화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무하의 작품의의

포스터의 힘으로 연극이나 상품의 매출이 크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에서 마음으로 직접 일하는 그림에는 음악이나 문학보다 사람들의 지성과 감정에 호소력이 있다'고 무하가 확신하는 것도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슬라브 서사시를 보면 거대한 크기에 놀라요. 또 '아르누보의 꽃'이라고 불리던 전형적인 무하다움도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슬라브 서사시는 그에게 무엇이었을까요? 뮤샤는 『슬래브 서사시』를 통해 「미래의 희망」을 그리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작품 전부가 완성되었을 때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독립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행복한 시대였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그린 <슬래브 서사시> 은, 시대에 뒤떨어진 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과 핵 위협, 또 테러와 경제불황, 기후변화 등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현대에는 슬라브 서사시 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메시지가 재검토되고 있습니다. 인류에게 공통된 주제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