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추상회화 이론의 창시자, 칸딘스키
바실리 와실리예비치 칸딘스키(1866년 12월 4일1944년 12월 13일)는 러시아의 화가, 미술이론가.미술사에서 칸딘스키는 피에트 몬드리안, 카지미르 말레이비치와 함께 순수 추상회화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대표적 저작은 추상예술을 이론화한 예술의 정신적인 것.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레코프 오데사 미술대학에 입학한다.졸업 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해 법률과 경제를 공부하고 타르투 대학에서 로마법에 관한 교수직을 맡다가 교직을 버리고 서른 살이 넘어서야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1896년 칸딘스키는 뮌헨으로 옮긴다.안톤 아즈베의 사립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고, 이어서 뮌헨 미술원에서 배운다.1911년에는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를 결성해 독일 전위예술운동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칸딘스키의 형태와 색채 분석은 단순함이나 장식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내면 표현이다.과학적이고 객관적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표현이었다.
칸딘스키는 작품을 통해 내면에 직접 작용하는 색채에 대한 의식을 강화하고, 현실의 외형 대신 색채의 울림에 의해 정신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꿈꿨다.1910년부터 1913년 사이에 그려진 '컴포지션' 시리즈는 칸딘스키의 대표적인 정신적 표현이다.
칸딘스키는 러시아 상징파의 신비롭고 포괄적인 세계관과 1908년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신지학의 영향이 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1914년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당초 모스크바에서 전위예술은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혁명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칸딘스키는 정치위원 등을 맡았다.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두하면서 모스크바 공산주의 안에서는 칸딘스키의 추상미술 이론은 낯설어지게 됐다.
스탈린이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자 1921년 독일로 돌아와 1922년부터 1933년 나치 정권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바우하우스의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이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게 됐다.
색을 소리로서 파악하는 공감각을 가지고 있던 칸딘스키는, 리하르트·바그너나 아르놀트·쇤베르크의 음악에도 감화되면서, 11년에 주제를 설정하지 않고 색과 형태로 회화를 표현하는 것을 논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을 출판.자신의 표현을 주로 외적인 것을 수용하는 「인상」, 안에 있는 기억등을 기초로 느낀 그대로를 그리는 「즉흥」, 그 집대성으로서의 「컴포지션」의 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14년에 독일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경험.이듬해 교육인민위원회 조형예술·공예예술부에 참여한다.
공직에 취임하면서 집중적인 제작이 어려워진다.제1차 세계대전 후 건국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개교한 바우하우스(19191933) 벽화의 교수로 초빙돼 2022년 독일로 갔다. 동교의 데사우에의 이전과 동시기에, 이론서 「점과 선으로부터 면에」(1926)를 간행한다. 바우하우스 교수 시절에는 원, 삼각 등을 많이 사용한 작품을 다루는 등 다양한 사상과 기법, 뮌헨 활동기부터 친분이 있던 파울 클레 등 당시 미술계를 견인하는 면면,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자극을 받는 환경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치의 통제로 바우하우스가 문을 닫을 때까지 후진 교육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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