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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간, 미술과 정신분석학의 등장

by 돌돌모아 2024. 2. 25.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미술의 정신분석학적 등장 

스토클레-궁전

 

 

지그문프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 첫머리는 『 아이네이스 」 에서 따온 다음 구절로 시작한다.

"내가 천상을 움직일 수 없다면, 지옥이라도 휘젛어 놓겠다." 빈 출신의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는 이 구절을 통해 "억압된 본능적 충동의 분투를 그려내고자 했다." 바로 이 지점 이 용감한 무의식의 탐험가 프로이트와 빈의 미술을 바꾼 구스타프 클림트(Gustay ximL, 1662-1918), 에곤 실레(Eyon Schiele, 1890~1918), 오스 카 코코슈카(Ocker Kokoschka, 1886~1980) 같은 대담한 혁신자들이 서 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이 화가들, 역시 20세기 초, 억압된 본능과 무의식적 욕망의 해방적 표현을 통해 지옥을 휘저어 놓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 화가들은 분명 지옥을 휘저어 놓았지만, 이는 단순한 해방이 아 니었다. 속박을 벗어난 표현은 정신분석학은 물론 미술에서도 보기 드물다. 그리고 프로이트 역시 이런 표현을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아시아 미술을 수집하는 보수적인 컬렉터였던 그는 모더니즘 미술가들에게 의혹을 품고 있었다. 동시대를 살아간 빈 출 신의 이 네 인물 사이의 연결 고리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발 전시킨 '꿈-작업'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 획기적인 연구에 따르면 꿈은 '수수께끼'로, 표현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비밀스 러운 소망과 이를 억누르려는 내부 검열자가 만들어 낸 토막 난 내러 티브 이미지들이다.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의 도발적인 그림과 초상 화에서 주로 나타난 이 갈등은 그림 속 모델과 화가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표현과 억압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들의 미술은 다른 어떤 모더 니즘 양식보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내리기에 적합했다.


오이디푸스적 반역
보통 파리가 모더니즘 미술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지만, 빈에서도 세 기말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들이 여럿 일어났다. 첫째 는 바로 '분리' 행위 자체였다. 클림트를 비롯한 열아홉 명의 미술가 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oseph Meria Olbrich, 1867-1908), 요제프 호 프만(osef Hofimann, 1870-1956) 등의 건축가 그룹은 1897년 미술 아카 데미에서 탈퇴하여 독립된 건물까지 갖춘 새로운 조직을 구성했다.네 보수적 아카데미 진영에 대항하는 분리파는 불어로는 아르 누보, 독일어로는 유제트슈틸(직역하면 '젊은 양식)이라 불리는 국제적 양식을 수용하고 그 이름처럼 새로움과 젊은 활기를 지지했다. 

 

우리 모두를 감시하는 초자아라는, 위기에 처한 권위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개별 주체 내부의 갈등, 즉 "집단적인 오이디푸스적 반역과 새로운 자 아에 대한 나르시즘적 추구의 모호한 조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문 화의 위기'(쇼르스케)였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가 계획적이거나 획일적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아카데 미와 분리파만 반목한 것은 아니었다.

실레, 코코슈카와 같은 젊은 화 가들의 표현주의 미학과 '총체예술(Gesamikunstwerk)'을 주장하는 클 림트 등 분리파 미술가들의 아르 누보 경향 사이에도 간극은 존재했다. (총체예술의 대표적인 예는 1905~1911년에 호프만이 설계한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 이다. 여기에는 클림트가 제작한 나무 모양의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분리파 내부 도 분열돼 있었다. 분리파 공방(Werkstatte)에서는 다른 대부분의 모더 스니즘 양식들이 억압했던 장식미술('장식적')인이라는 말은 추상미술 옹호자들에 게 당혹스러운 용어였다.)을 장려했는데, 가령 클림트는 모자이크뿐만 아니 라 템페라와 금박 같은 고풍스러운 매체를 사용했다.

 

그러나 선과 색 채의 사용에서는 추상적인 형태의 모더니즘 실험을 장려했다. 이처럼 모순에 빠진 분리파는 양식적으로는 구상과 추상, 분위기상으로는 세기말적인 불안(Fin-de-siecle)과 20세기 초의 삶의 기쁨(joie de vivre) 사이에서 갈등했고, 이런 갈둥은 클림트를 계승한 실례와 코코슈카 의 날카롭고 거의 신경증에 가까운 선(8) 표현에서 드러나곤 했다.

 

독일의 위대한 평론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분 리파의 아르 누보 양식에 내재한 이런 긴장이, 공예의 개인적인 기반 과 공업적 생산의 집단적 기반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에서 야기된 것 임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외로운 영혼을 형상으로 바꾸는 일은 (아르 누보의) 명백한 목표였다. (별 기에의 디자이너 헨리) 반 데 벨데에게 집은 개성의 표현이었다. 집의 장식은 회화의 서명과 같은 것이었다. 아르 누보의 진정한 중요성은 이데올로 기로 표출되지 않았다. 아르 누보는 기술 진보에 의해 상아탑에 갇혀 버린 미술의 편에서 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그것은 내면성(nteriority) 의 모든 남아 있는 병력들을 동원하여, 선이라는 매개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기술로 무장한 환경에 대항하는 벌거벗은 식물성 자연 의 상징인 꽃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